"코딩 기술 교육? 차라리 추리소설을 쓰게 하세요” -데니스 홍

"코딩 기술 교육? 차라리 추리소설을 쓰게 하세요”

 

1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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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스폐셜
내아이를위한 미래 편에서
출연하셔서
코딩교육의 필요성을 말씀해주신
UCLA교수이자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님께서
서울시교육감과의 대담내용 기사입니다.

이분께서 평가하시는 좋은 코딩교육이
코딩앤플레이의 바탕인듯하여 발췌하였습니다^^

#한국일보 기사#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 한국 교육에 조언

조희연 서울교육감과 대담에서
“의무화된 코딩 교육, 방식엔 한계
문법 가르치는 대신 사고력 키워야
여러 식재료 놓고 요리 맛 생각하듯
논리적 해결 방법을 배우는 게 핵심”

“한국 교실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먼저 심어줘야 한다고 봐요. 질문을 할 때 남의 시선을 두려워한다든가, 틀리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의 공통점은 장점이 분명한 데도 항상 자신의 단점만을 생각해 두려워한다는데 있죠.”

6ㆍ13 교육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요즘 가장 큰 고민은 ‘교실의 변화 행보에 어떻게 가속을 붙이느냐’다. 어떤 분야보다 변화 필요성이 크지만 역설적이게도 속도는 가장 더딘 한국 교육의 경직성을 지난 4년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해답을 찾기 위해 26일 조 교육감이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로봇공학자이자 미 UCLA 기계항공공학과 교수인 데니스 홍(47)과 마주 앉았다. 홍 교수는 2009년 과학전문지 ‘파퓰러사이언스’에서 젊은 천재 과학자 10인에 선정되고, 미국에서 최초 휴머노이드 로봇인 찰리 등 다양한 로봇을 창작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 한국에서 대학까지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 교육의 한계를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한 듯 거침없이 조언을 쏟아냈다.

데니스 홍=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들은 ‘인간 계산기’로 통한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수학 문제는 기가 막히게 잘, 빨리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문제 혹은 답이 여러 개인 개방형 문제를 내면 딱 막혀버린다. 프로젝트 수업을 할 때도 토론 참여의 적극성은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질문을 안 한다는 점이 한계다. 질문을 할지 모르는 건지, 질문을 하기 두려워하는 건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조 교육감(이하 조)=“앞으로 4년 간 ‘질문 있는 교실’ 정책을 도입하려는 이유와 맞닿아있다. 산업화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는 1등의 장점을 더 빨리, 많이 배우는 게 습관이 됐다. 이 과정에서 질문이나 의심을 갖지 않는 데 길들여진 게 아닐까 싶다.”

데니스 홍=“적극 동감한다. 대신 한국 교실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먼저 심어줘야 한다. 한국 학생들은 영어 성적을 100점 맞으면서도 수학이 0점이면 그 단점에만 파고들어 주눅이 든다. 잘 하는 부분을 격려해 주고 자존감을 높여줘야 한다.”

정부는 4차 산업혁명에 적극 대응해 ‘제2, 제3의 데니스 홍’을 배출하기 위해 올해부터 코딩을 중심으로 하는 소프트웨어 교육을 의무화했다. 조 교육감도 이에 발맞춰 ‘서울형 메이커 교육(제품 기획ㆍ제작ㆍ완성을 모두 학생 스스로 판단해 이끄는 것)’ 활성화에 방점을 찍고 거점센터 구축 등을 약속했다.

홍 교수는 “코딩교육 의무화는 긍정적”이라면서도 “방식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고 했다. 한국은 아이들에게 코딩 문법만 가르치려 하는데 코딩 교육의 핵심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정의하고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정부 고위 인사가 코딩교육에 대해 묻길래 문법 교육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추리소설을 직접 쓰게 하고 요리 교실을 많이 만들라고 했어요. 당황하더군요. 추리소설을 쓴다는 건 단계적ㆍ논리적으로 단서를 마련하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고, 요리는 다양한 재료들을 섞어서 어떤 맛이 날지 차근히 생각해보는 과정이에요.” 그는 “지금처럼 교사가 컴퓨터에 입력할 언어들을 던져주고, 아이들이 그걸 받아 넣어 결과를 내면 끝나는 식의 소프트웨어 교육은 한계가 있다”고 단언했다.

대담 주제는 ‘융합 교육’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선 오래 전부터 융합 교육이란 용어가 교육 현장을 달궈왔다. 올해부터 도입된 2015 개정 교육과정도 이에 맞춰 문ㆍ이과 구분을 없앴고 학생 참여형ㆍ토론형 수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조=“인공지능(AI)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어떻게 교육을 혁신시켜서 미래를 만들어낼지 고민이 많다. 학생들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내도록 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하다고 보나.“

데니스 홍=“그간 제작한 로봇 중에 다리가 3개 달린 ‘스트라이더’ 로봇이 있다. 이건 어렸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딸의 머리를 땋아주는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 ‘찰리’라는 로봇을 만들 때는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사슴 무릎을 상상했다. 이렇게 관계 없는 것들을 연결 짓는 능력을 길러주는 중요한 요소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내가 소장으로 있는 로멜라 로봇연구소에는 밤낮 할 것 없이 학생들이 북적거리는데, 그게 약속이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가 있으면 열정이 생기고 이후 탐구력, 창의성은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이다.”

조=“학부모들도 이제는 자녀들이 무조건적으로 공부를 잘 해야 한다기 보다는 ‘꿈을 이루는, 행복한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학생들이 가치 있는, 담대한 꿈을 꾸도록 하기 위해선 무엇이 중요한가.”

데니스 홍=“한국에선 꿈이 곧 직업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꿈은 직업과 같을 필요가 없다. 또 꿈이 여러 개 있어도 된다. 부모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제 꿈은 로봇공학자였지만 유일하진 않았다. 지금도 요리사, 마술사 등 많은 꿈을 좇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목표 하나쯤 품고 사는 삶

[마음읽기] 목표 하나쯤 품고 사는 삶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어쩌다 목표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 사회는 목표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무의미한 노동을 되풀이하는 시시포스로 치부하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목표를 포기해야만 행복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마르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라고 칭송받던 ‘목표’가 워라밸을 위협하는 흉물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게 된 데는 목표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큰 역할을 했다.
 
몇 년 전 어떤 분에게서 항의성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행복에 관한 필자의 강연을 동영상으로 접한 후에 보내온 이메일이었다. 이메일 곳곳에 원망과 항의, 그리고 울분이 배어 있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사연은 이랬다.
 
그 강연에서 필자는 행복에 관해 우리가 가진 프레임이 지나치게 협소한 까닭에 행복을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즐거움 정도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거나 호기심으로 충만한 상태 역시 행복이며, 그런 관심과 호기심에 기초하여 의미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함을 제안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이메일을 보낸 분의 이해는 달랐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불행의 주범이 바로 목표 지상주의이며, 목표 지상주의가 우리 사회를 피로 사회로 만들었다고 항변하면서, 어떻게 행복의 수단으로 목표를 강조할 수 있느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취미나 관심사를 뜻하는 ‘개인적 관심(personal interest)’을, 스펙 쌓기와 물질적 성공을 강조한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보내온 이메일이었다.
 
과도한 목표 지상주의는 그분의 지적처럼 행복의 장애물이다. 국가의 평균 노동시간이 길수록 국민의 평균 행복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명백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행복의 해법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목표 지상주의에 대한 경계가 목표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 전체를 태우는 것과 같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실제로 사람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물으면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답이 자신의 꿈, 비전, 소망, 그리고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반대로 불행한 이유를 물으면 ‘꿈을 잃었기 때문’, ‘목표가 좌절되었기 때문’, ‘더 이상 소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개인의 행복 수준은 그 개인의 소망과 필요, 그리고 목표가 달성된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많은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행복 연구에서는 목표를 행복의 ‘원천(wellspring)’이라고까지 부른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는 목표에 대해 알레르기성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아무런 목표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목표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목표에는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것, 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가문을 빛내는 것 등과 같은 큰 목표도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는 것,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상적이고 소소한 목표도 존재한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목표의 크기가 아니라 목표의 개인적 의미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일지라도 개인에게 의미가 없다면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적’ 목표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개인적 목표보다는 집단적 목표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아를 위해 소아를 희생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목표란 늘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 반의 축구 경기보다는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가 늘 더 중요했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과연 그러한가?  
     
체중 조절을 위해 간식을 먹지 않기, 주말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기, 타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기, 물질주의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등등 개인적 목표는 비록 우리의 연봉을 올리거나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 삶에 규칙과 질서를 제공하고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제공해준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타인의 기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오다 보니 정작 중요한 개인적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목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이다. 남의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발견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표의 일상성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하고 거대한 것들만이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목표 지상주의에 대한 경계라는 이름으로 작고 소중한 목표들을 등한시한다면, 자신만의 행복 수원지(水源池)를 스스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목표는 활주로와 같다. 그것이 없다면 삶은 충돌의 연속일 뿐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마음읽기] 목표 하나쯤 품고 사는 삶